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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스페인 모로코 포르투갈 그리고 암스텔담

에스파니아 포르투갈 모로코 그리고 암스텔담

 

0. 일정 : 2015. 4.10~4.21(11박12일)

0. 동반자 : 김용천 부부 강석희 부부 김선무 부부

0. 여행사 : (주) 노랑풍선

0. 인솔자 이기복 (010-6397-9599)

    현지가이드 김세기(0034-664-876-747)

 

 

 

여행에 앞서

 

  해외 장거리 여행에 대한 두려움이 생긴다. 실비아가 지난 번 호카이도 여행에서 마지막 이틀을 너무 힘들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 일정이 잡히자 몸조심과 함께 한약을 주문해서 복용하도록 하고 최대한 몸을 추스르도록 했다. 그런데도 여행 출발 3일 전에 탈이 났다. 우현 엄마 아빠 생일을 기념해서 함께 먹은 조개 관자가 실비아에게 탈이 나게 했다. 출발 이틀 전에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고 하루를 지내보고 낫지 않으면 여행을 취소하기로 마음 먹고는 실비아에게 얘기했더니 하루만 더 기다리자고 한다. 하루가 지나자 조금 나아졌다. 그래서 링거를 하나 더 맞고 여행 준비를 했다. 환전하고 옷이랑 소지품을 챙기는 등 바쁘게 준비하고 가방을 대충 꾸렸다.

  유럽 쪽은 물이 좋지 못하므로 삼다수 10개랑 한라산 팩 소주 15개도 사고 여벌옷은 3벌 정도로 준비했다. 가급적이면 현금은 조금만 소지하기로 하고 환전은 선택 관광과 가이드 팁까지만 준비했다.

 

  당초에는 4월 8일 미리 올라가서 나리랑 하루를 보내고 출발할까도 했지만 나리도 번거로울 것 같아서 4월 9일 오후 비행기로 가서 올 때에는 4월 21일 김포에서 출발하는 편으로 돌아올 것으로 예약했다가 인천에서 제주로 오는 비행기 편이 시간이 맞을 것 같아서 그 편을 예약했다.

  진에어로 4월 9일 17시 편으로 김포에 도착해서 강석희 씨 부부랑 만나서 리무진으로 인천공항으로 갔다. 인천에 20시경 도착해서는 용천네 부부랑 저녁을 먹으려다 가이드 미팅 후에 먹을 것으로 했는데 가이드 미팅 후 출국 수속을 하다보니 식당을 모두 닫아버려서 그냥 출국장으로 가서 거기서 간단히 때웠다.

 

 

  자정이 지나고 4월 10일 1시 경에 네델란드 국적의 KLM 비행기을 타고 출발했다. 기내식이 두 번 나오고 현지시각 아침 5시 경 네델란드 스키폴에 도착해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 타고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11시 반 경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실비아는 다행히 잘 견뎌 주었다. 식사도 그럭저럭 잘 하고 잠은 부족해도 예감이 좋다.

 

2015.4.10.(金). 맑음. 1일차.

  비행기에서 15시간을 보내고 35명 모두 버스에 탑승해 투어가 시작됐다.

바로셀로나 공항에서  50km를 달려 몬세라토로 이동한다. 이동하는 도중 바르셀로나 시내풍경은 지중해성기후로 따뜻하고 햇볕이 많아 화창한 날씨 등 우리나라와 비슷하지만 광활한 대지는 부러웠다.

  바로셀로나는 스페인 제2의 도시로 에스파냐 17개주의 하나인 카탈루냐 지방의 중심도시이며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항구도시로 최대의 산업도시이다. 중세 에스파냐의 4대 왕국인 아라곤 왕국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1492년 이사벨 여왕이 그라나다의 아랍인을 내쫓으면서 통일을 달성하였고 동 년 세비아항에서 출발한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바로셀로나항으로 귀국했으며 바로셀로나항에는 이를 기념하여 65m의 기념탑이 있다. 지중해를 낀 해안선은 무려 3,000km에 달해 유럽의 관광객을 불러 모은다. 1992년 개최된 올림픽에서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 우승을 차지한 곳이기도 하다.

  바르셀로나(과거 아라곤 왕국)는 프랑코 총통이 죽고 나서는 카탈루냐의 자치권을 되찾았고 그들만의 언어인 카탈란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지금은 스페인 사람이기를 거부하고 카탈루냐의 독립을 원하고 있다. 1983년 부산과 바로셀로나 두 도시는 자매 결연을 맺었다 한다.

   첫 관광지인 몬세라토에 도착했다. 몬은 「산(山)」, 세라토는 「톱니」라는 뜻으로 「톱으로 자른 듯한 산」이란 뜻으로 바다가 융기해서 지각변동에 의해 생긴 산으로 해발1,235m높이이다.

   11세기 양치기 소년이 성스러운 빛을 보고 검은 마리아 상을 발견하며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베네딕트 수도원이 있어 순례자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해발 725m에 위치한 신비하고 영험한 기분이 도사리는 곳으로 장엄한 바위산에 검은 성모 마리아를 모시고 있는 이곳은 만지면 소원을 이룬다는 곳으로 2층에 모셔져 있다. 1811년 프랑스 나폴레옹의 군대에 의하여 상당 부분 파손되고 수도사들도 처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곳 성당은 1858년 다시 복원하였으며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 세워져 있다. 현재 60명이 수도사들이 거주하고 유럽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소년합창단 (에스콜라니아 합창단)학교가 수도원과 함께 운영되고 있다. 베네딕트 수도원은 나폴레옹이 침략 때뿐만 아니라 과거 카탈류냐가 박해받던 시절에도 끝까지 살아남은 카탈류냐의 성지이며, 에스파냐 카톨릭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이 수도원의 지하는 성인들과 내전 때 돌아가신 유해를 모셔 놓은 묘지가 조성되어 있다. 이 묘지는 풍수지리에 의해 지중해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명당터라고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에서 옵션으로 30유로를 더 내고 1930년 독일인에 의해 만들어진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후 톱니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몬세라토 산과 수도원을 조망하였다.

  몬세라토 관광을 마치고 도착한 곳은 몬쥬익 언덕이다. 몬은 「산」, 쥬익은 「유대인」으로 「유대인이 사는 산」이란 뜻이다. 에스파냐를 통일한 이사벨 여왕이 유대인 추방령을 내리자 유대인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던 지역이라 하며, 1992년 바로셀로나의 영웅 황영조 선수가 마라톤우승을 거머쥔 올림픽 주경기장이 있는 곳이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이 개최되었던 주경기장과 주요 경기장이 몬쥬익 언덕에 시설되었다. 해발 212m의 이곳에서 시가지를 조망하고, 황영조 선수의 마라톤 우승을 기념하기 위해 경기도 가평 오석으로 제작되어 이곳에 시설된 조형물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주경기장을 관람한 후 에스파냐의 천재적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구엘 공원으로 향했다.

 

  구엘 공원은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백작이 영국식 정원을 주제로 한 주택 단지를 만들고자 가우디에게 맡겨서 14년간 공사하였으나 단 3채만 분양되고 미완성의 단지로 남게 되었다. 1922년 바로셀로나 시에서 이를 인수하여 시민공원으로 개방하였으며 이 공원에 있는 가우디의 작품은 1984년 유네스코 지정문화제로 등록되어 있다. 갖가지 색과 모자이크로 장식된 각종 건축물은 마치 동화의 나라에서 거니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아기자기한 모습이다.

  이곳의 작품을 통하여 가우디는 이렇게 말한다. 「자연은 곡선이나, 인간이 직선을 선택했다.」라고. 이 공원에 있는 작품은 버려지는 폐품조각 세라믹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처리한 곡선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음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lia) 성가족 성당이다. 성가족 성당은 스페인이 낳은 천재 건축가인 가우디의 최후 작품으로 미완성작이며 가우디가 사망한지 100년이 되는 2026년에 완공 될 것이라 한다. 내부 성당은 2010년에 완공되어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참석한 봉헌미사가 집전되었다. 성가족 성당은 성당 이름이 보여 주듯이 성인 가족 즉 예수, 요셉, 마리아를 위한 성당이다. 130년 동안 지어지고 있으며, 현재도 계속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곳 그란비아는 가난한 노동자들이 살던 지역으로 노동자들이 「우리가 사는 이곳에도 성당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하며 22년 동안 성금을 모아 1882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였다. 9년 후 1891년 안토니오 가우디가 건축에 참여하게 된다. 참여하면서 가우디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성당을 짓겠다.」라고 하며 기존의 설계를 모두 버리고 다시 설계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42년간 그의 일생을 바쳤다. 그는 다양한 건축 시공 양식을 동원하였으며 각종 구조물을 손으로 직접 조각하여 건물을 올리게 됐다. 그래서 자세히 보면 조각품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나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우디는 해가 뜨는 동쪽 벽으로 부터 건설한다. 성당 건물의 기둥은 52개인데 그 이유는 1년 주일이 52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가우디는 숲속에서 미사를 드리고 석양에 비친 스테인드 그라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연 친화적인 성당을 원했다고 한다. 성당 남쪽 부활과 영광의 벽에는 전 세계 각국 언어로 쓰여진 주기도문이 있다. 한글 주기도문도 함께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또한 성당의 설계서에 탑이 18개중 현재는 8개의 탑이 완공 되었으며 탑의 모양은 옥수수 모양으로 조성되었다. 성가족성당은 1931~1939년 동안 정치적 혼란으로 무정부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여 노동자와 신부 수녀들이 학살되었으며 성당시설도 많은 부분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 성당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교통사고로 사망하였으며 그의 시신은 이 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 되었다. 전문가들은 「2026 ~ 2035년 사이에 교회가 완공되지 않을까?」라고 짐작하고 있으나 「이 건물이 끝나는 것은 하느님만 아실 것이다.」라고도 말한다.

  건물을 조성하는 기금은 75%는 입장료 25%는 기부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이곳 사람들의 종교관이 대단함을 느끼는 대목이다.

 

  스페인은 소매치기가 많다고 하더니 첫 날 이를 확인하였다. 호텔인 HOLIDAY INN BARCELONA에 도착해서 방 배정을 하고 키를 받는 동안 일행 중의 한분이 여행용 큰 가방 위에 카메라 가방을 놓고 있었는데 방 배정을 받고 보니 없어졌다. 우리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어떤 남자 3명이 쇼파에 앉아 있었는데 아마 그들이 훔쳐서 달아난 것 같았다. 우린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다음날 아침에 그런 사실을 알고는 여행 기간 내내 소매치기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되었다. 

 

2015.04.11.(土). 맑음 2일차

  아침 8시30분 출발이다.

  오늘부터는 가이드로 김세기씨가 동행한다. 그는 아들이 축구를 좋아해서 유소년 축구 유학을 위해서 스페인으로 3년 전에 이민 왔다고 한다.

  바로셀로나를 출발 1시간3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하여 필라르(기둥) 대성모 성당이 있는 사라고사에 도착했다. 이곳 사라고사는 아라곤 지방의 수도이자 스페인 5번째로 큰 도시로 수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중간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물류 교통 중심지로 성장했다. 시내를 가로지르는 에브로 강가에 있는 필라르 성모성당은 화려하게 타일을 붙인 11개의 둥근 지붕으로 유명하다. 성모 마리아가 나타나 신앙을 전파하러온 성 야고보에게 기둥을 전했다는 것에서 유래되었고 이 성당의 천장에는 이 도시 출신 천재화가인 고야의 프레스코 화가 천장에 그려져 있다.

대성당이란? 그 도시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며 주교님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을 말한다.

  바실리카 성모성당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져 현재 유일하게 남은 성벽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성모님에게서 받은 기둥을 만지면 소원성취가 된다고 하여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둥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옥기둥을 만지고 기둥 속을 볼 수 있다. 그 기둥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져서 움푹 패여 있었다.

  필라르란 기둥을 의미하며 성당을 나오면 필라르 광장으로 이어지는데 이 광장은 2008년 세계박람회 때 조성된 광장으로 자연과 물을 주제로 조성되어 광장 한 켠에 인공폭포수가 만들어져 있으며 로마 제국 유적인 성벽을 보존하여 관광객에게 보여 주고 있다. 성당 옆 건물에서는 군인이 결혼을 하는지 군인도를 들고 도열한 결혼식 모습도 볼 수 있었다. 필라르성당과 광장을 보고나서 즐거운 점심시간이다.

  오늘 점심은 중국식이다. 중국식 음식이 중국에서와는 달리 향료를 쓰지 않아, 유럽식 중국음식의 맛은 일품이라 식사하는데 어려움은 없다.

  점심 후 2시 출발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로 이동한다. 이동시간은 4시간 정도 걸렸고 마드리드로 향하는 고속도로 주변에 끝없이 펼쳐지는 풍력발전단지가 장관이다. EU 연합의 환경개선책의 일환으로 원자력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의에 의해 자연친화적인 풍력을 이용하여 전력을 충당하고 있다고 한다.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가 사라고사와 바르셀로나에 대한 간단한 안내를 한다.

  바르셀로나는 카톨릭 국가라서 수도원이 많다. 이베리아 반도의 북동부 지중해의 온난화 기후로 먹거리와 과일과 꽃이 풍부한 스페인 제2의 도시이다. 성곽 안에 형성된 도시로 도시 구획정리가 잘되어 있다. 입헌군주국으로 왕권이 강화된 국가이며 하니발 장군이 부친을 기념하기 위해 바르셀로나라고 명명했으며 로마가 6세기를 지배했다. 시내 람블라 거리에는 건물 높이를 8층으로 제한하고 도로 4거리 코너 건물을 타원으로 돌려 건축하여 각이 없다. 그래서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어 도시의 아름다움을 한눈에 알 수 있다. 고딕 건물이 즐비하게 연결되어 세계의 어떤 거리보다 아름답고 편안한 마음을 느끼는 도시이다.

  스페인의 어떠한 도시를 가더라도 아파트 연립주택 단독주택의 지붕에 굴뚝이 많다. 이는 원자력발전을 하지 않기 때문에 난방에 쓰여지는 전력을 줄이기 위해 모든 집안에는 베치카(실내 벽난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베치카에 사용되는 땔감은 슈퍼에서 손쉽게 구입할 수 있다고 한다.

  안토니오 사마린치(IOC 위원장)이 바르셀로나 출신이다.

  에브로 강변에 있는 도시 사라고사는 2000년 전 로마 영토였다. 그래서 이곳에는 로마 유적지가 많다. 기원전 로마 시대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를 있는 고통이 요충지로 부유한 도시였다.

  1118년 아라곤왕 알폰소 1세가 이슬람교도의 도시를 빼앗았고 그 후 19세기에는 나폴레옹이 거느린 프랑스군이 침입을 받아 전쟁터로 변하는 슬픈 역사를 가진 도시이다.

  스페인 국기는 3개의 색으로 3등분되어 있다. 가운데 노란색은 영토, 상하의 빨강색은 선조들의 피를 흘려 나라를 지킨 것을 의미하며 가운데 노랑색 영토위에 있는 왕관은 카롤라스왕의 왕관을 뜻하며 이는 입헌군주국인 스페인 왕권이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4월 12일(日). 맑음. 3일차.

  오늘은 마드리드 시내 투어를 하고 스페인 중세도시인 똘레도로 이동한다.

  마드리드는 스페인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도시이며 해발 650미터에 자리 잡은 고원 도시이다. 이베리라 반도 중앙에 위치한 카스티야 지방의 대표 도시이자 수도인 마드리드는 16세기부터 펠리페 2세가 왕궁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스페인의 수도가 되었으며 유럽국가의 수도 중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도시이다. 구 시가지는 17~18세기에 건설된 원형을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으며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미술관 박물관 등 많은 유적을 갖고 있다. 반면 시가지는 대도시로 변모하고 있어 신구의 조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이다.

아침 일찍 도착한 곳은 스페인 광장이다. 스페인 광장이라 해서 굉장한 그 무엇인가가 있을 거라고 큰 기대를 가지고 갔으나 광장에 도착해보니 돈키호테와 노새를 타고 있는 산초 판사의 동상뿐이다. 스페인 광장은 세르반데스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된 광장으로 광장 중앙에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앞쪽에 돈키호테와 노새를 탄 산초박사의 동상이 있다. 여왕의 길 그란비아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란비아는 「가장크다」 는 뜻이다. 가장 큰 거리라서 「여왕의 길」 이라고 한다.

 

  스페인 광장을 지나 다음 도착한 곳은 프라도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과 더불어 세계 3대 미술관의 하나로 손꼽힌다. 프라도 미술관은 회화, 조각등 9,000여 점의 회화를 일반에게 공개하고 3만 점 이상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그중 약 3천 점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다. 16~17세기 스페인 회화의 황금기에 활동했던 화가들이 주옥같은 작품들이 진열되어 있으며 특히 고야의 나체그림에는 피부의 실핏줄까지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어 사진인지 그림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그려진 사실화가 관광객의 시선을 모이게 한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벌거벗은 마하와 옷 입은 마하, 루벤스의 삼미신, 베라스케스의 시녀들, 엘 그레코의 삼위일체 등의 명화를 실물로 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 당시에 여자의 나체를 그림으로 표현할 용기와 발상이 대단하다. 천진난만하게 웃음 짓는 어린아이의 그림이나 분노에 찬 왕이 얼굴 등은 실물이 서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솜씨는 과연 「사람의 작품인가?, 신의 작품인가?」나는 지금까지 그림을 보아도 별로 감동하지 않는 미술치였으나 이곳에서 직접 고야와 피카소 알 그레코 등의 명화를 보고는 조금은 그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피카소의 그림이 한 방향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보는 시각으로 그린 것이라는 설명과 빛의 조화 등을 반영한 화가들의 솜씨 등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다.

  미술관을 나와 거리를 조금 걸고 나서 도착한 곳은 솔 광장이다. 솔 광장 중심으로 해서 방사형 도로 9개의 길이 마드리드의 중심지이다. 이 광장은 스페인이 시작되고 끝나는 곳으로 시의회 건물이 포인트이다. 마드리드의 어원은 「우루시아」로 곧 「곰」을 뜻한다. 그래서 이 광장 중앙에는 이 도시의 상징물인 곰이 나뭇잎을 뜯어 먹고 있는 조형물이 있다. 이곳이 큰 건물에는 스페인기 EU연합기 7별이 그려진 빨강색기가 나란히 걸려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다. 7별이 그려진 빨강색 기는 시의회기인데 이는 시의회의 막강한 힘을 나타내는 것이라 한다.

  점심은 한식이다. 김치와 제육볶음으로 맛있는 식사를 마치고 2시간 이동하여 도착한 똘레도는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 유산도시이다. 이곳은 좁고 복잡한 거리를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독특한 멋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가톨릭과 이슬람 그리고 유태교인들이 한데 어울려 지내는 곳이었으나 1086년 가톨릭이 수복 한 후 스페인 가톨릭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기기 전에는 이곳 똘레도가 수도였으며 1800년대는 전세계 80퍼센트 금을 보유하여 막강한 부를 자랑하는 도시였다.

 똘레도 대성당은 스페인 수석 제1성당이다. 똘레도 대성당은 처음에는 회교사원이었으나 1225년 페르난도 3세가 이슬람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이슬람 사원이었던 자리에 고딕 양식을 기반으로 성당을 짓기 시작해서 1493년에 완공되었다. 똘레도 성당 내부 상부의 아치형 지지대가 2개씩 건설된 점이 독창적 기법이라고 한다. 이는 건물을 단단하게 짓기 위함이다. 고딕양식으로 지어진 상단은 보물실, 성체보관실 등 5개의 신랑(색션)으로 나누어져 있다. 보물실은 독일인에 의해 시공됐다. 한때 독일도 스페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성체보관실에 있는「성체 현시대」는 예수님의 몸을 모셔놓은 함인데 처음에는 은으로 칠했으나 다시 금으로 도금했다고 한다. 양가죽에 금체를 입힌 성경책도 보관되어 있다. 이 성당 지하에는 성인이 유해도 안치하고 있다. 성당 안에는 작은 예배당이 많은데 처음에는 개인 소유의 예배당이었으나 헌납 형식을 통해 모두 성당에 기부한 것이다. 성당 천정에서 들어오는 자연 채광을 이용한 조명대가 성당의 성스러움을 더해준다. 성당 한쪽 면에 실물보다 더 큰 대형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는 항해를 상징하는 성인인 크리스토퍼 콜롬보스의 초상화이다.

  스페인, 포르투갈은 강한 해상강국이기 때문에 콜롬보스를 성인과 견주고 있다. 그 옆에는 편안하게 앉아 미소 짓고 있는 아기예수의 그림도 나란히 함께 있다. 대성당 앞의 첨탑이 크기가 다르다. 그 이유는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균형을 맞추어 건물의 안전성을 유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똘레도 대성당을 나와 산또 또매 교회로 이동했다. 산또 또매 교회는 산또 또매가 수호성인이며 250년전 세상을 떠난 오르가즈 백작의 죽음을 추모하는 명작 「오르가즈 백작의 장례식」이 소장된 교회이다. 오르가즈 백작이 죽을 때 “내가 죽으면 나의 전 재산을 산또 또매 교회에 헌납하고 좋은 일에 사용하기를 바란다.”라는 유서를 남겼으며 그를 위해 이 교회 안에 오르가즈 백작이 유해를 모셨다고 한다. 그림에는 백작의 아들도 그려져 있고 화가자신도 장례식에 참석해 명복을 비는 모습을 그려 놓고 있다. 오르가즈 백작이 장례식 그림의 주제는 「살아 생전에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백작처럼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르침을 나이 어린 아들에게 일러 주기 위함」이라고 한다. 천국이 열쇠는 천주교 최초의 주교이신 베드로가 가지고 있는 모습도 그림 속에 있다.

  백작의 장례식 그림을 뒤로하고 교회를 나오면 「산마르틴 다리」가 나온다. 이 다리는 700년된 다리로 성당과 교회를 짓기 위한 모든 자재들을 수송하기위해 만든 다리이며 처음에는 목재 다리였으나 그 후 재시공하여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다.

  현지식으로 저녁을 해결하고 다시 2시간을 이동하여 마드리드 숙소에 도착했다. 

 

4월 13일(月). 맑음. 4일차.

  오늘일정은 마드리드→ 콘수에그라→ 점심(현지식) → 그라나다로 향하는 대장정이다.

  아침 8시30분 출발 1시간 40분이동하여 콘수에그라(풍차마을)에 도착했다.콘수에그라는 돈키호테 고장이며 오늘은 문학 기행이다. 돈키호테가 여인숙 주인에게 “나에게 기사 작위를 수여하라.”  하여 여인숙 주인에게 기사 작위를 받은 후 콘수에그라의 풍차를 향하여 돌진해가는 내용의 배경이 된 곳이다. 이곳의 풍차는 방앗간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안내소와 기념품 판매소를 하고 있다. 지대가 높아 시내를 한눈에 조망 할 수 있으나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 기념촬영도 힘들었다.

 

돈키호테가 기사 작위를 받은 여인숙은 세르반테스의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으며 관광객이 쉬어갈 수 있도록 찻집과 기념품 가게가 있어 여유롭게 차 한잔을 하며 용감하기도 하고 어리석은 돈키호테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베네치아에서 군에 입대하여 총상을 입고 포로가 되어 아프리카에서 5년간 노예로 살았는데 삼위일체 수도원에서 구조되어 세무공무원으로 근무하던 중 비리혐의로 투옥되어 옥중에서 돈키호테를 썼다. 이 걸작은 에스파냐 각 지방마다 다른 언어(사투리)를 총정리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3시간을 이동하여 산맥 하나를 넘어가 그라나다 알함브라 궁전 투어를 하러 간다.

3시간 이동 도중 가이드가 1990년 로마에서 공연했던 세계 3대 테너 가수 합동 공연 실황 중계 CD를 보여준다. 3대 테너는 이탈리아의 루치아노 파바로티, 스페인이 낳은 플라시도 도밍고, 백혈병을 이겨낸 서정적인 목소리의 주인공 호세 카레라스이다. 3대 테너 중 도밍고가 이곳 스페인 출신이다. 그는 아깝게도 2007년 사망을 하여 다시는 수려한 그의 모습과 웅장하고 힘찬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스페인은 올리브나무가 엄청나게 많다. 자고 일어나 차창 밖을 보면 올리브나무만 보인다고 한다. 올리브나무는 내가 심으면 내 후손이 먹는 나무라고 한다. 올리브나무를 심고 나서 20년이 지나야 열매를 딸 수 있으며 심을 때는 암, 수나무를 한구덩이에 함께 심어야 한다고 한다.

  그라나다는 711년 용병으로 왔던 무어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1492년까지 지배하면서 꼬르도바에 수도를 정하였다가 나중에 그라나다로 수도를 옮긴 것이며 이슬람 마지막 왕정 나스르 왕조가 산속 깊숙이 숨어 살게 되며 번영된 도시이다.

  이슬람교도에 의한 이베리아 반도 지배의 마지막 거점으로 이곳 시비카(알함브라 언덕)에 빨강색 성벽과 탑이 있는 알함브라 궁전이 있다. 아랍어로 알함브라는「붉은 성」이라는 뜻으로 알함브라 궁전은 기독교와 이슬람 양식이 절묘하게 융합된 건축물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의 하나로 꼽힌다. 기독교인들에 쫓기여 그라나다 최후의 거점 도시로 삼은 이슬람교도인들은 1238년 나스르 왕조 때 부터 궁전을 세우기 시작하여 14세기 후반에 완공하였다. 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알함브라 궁전은 언덕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성요새를 튼튼히 하기 위해 이슬람 건축물이 특징인 벽돌을 옆으로 눕혀 건물을 짓는다. 왜냐하면 벽돌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에 튼튼하다. 궁전이 너무 튼튼하기 때문에 건물무게를 이기지 못해 약해진 지반 영향으로 건물 외벽에 많은 금이 생긴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한 연구가 다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 궁을 짖는 데는 모카라베 양식을 썼는데 이는 마호멧이 가브리엘 천사의 게시에 따라 만든 동굴 양식이다.

  궁전 안에는 정원이 많다. 정원이 많다보니 정원수를 위한 물을 필요로 하고 있다. 유럽 여행을 하며 느낀 것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물을 확보하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이곳 알함브라 궁전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물은 시에라 산맥에 있는 눈이 녹아내리는 것을 저수지에 모아뒀다가 수 십  km의 수로와 수로교를 통하여 이곳까지 수송한 후 낙차를 이용해서 궁전 곳곳으로 공급하고 있다. 낙차를 이용한 그들의 토목 기술을 볼 수 있는 한 단면이다. 이 수로를 스페인어로 「아세끼」라고 한다. 이 궁전에는 아세끼가 잘 정비되어 있어 많은 정원을 관리 할 수 있다고 한다.

  알함브라 궁전은 5,000명이 거주할 수 있는 규모로 궁전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샤이트레스나무( 사랑나무, 큐피트나무: 박태기나무?)가 우리를 반겨준다.

  처음 정원은 신들의 정원이다. 이 정원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사는 곳」 즉, 신들이 사는 곳이란 뜻이다. 17km에서 물을 끌어 들인 후 낮은 정원과 공연장까지 이어지는 아세끼(수로)가 너무나 잘 설치 되어 있어 여러 가지 나무와 꽃들이 조화롭게 자라나고 있다. 그 다음은 여름정원이다. 왕들이 더위를 피해 지낼 수 있도록 만들어진 정원이다. 평화를 상징하는 오렌지나무가 많고 아라베스크 양식으로 화려한 문양이 그려진 타일로 지어진 건축물이 참으로 아름답다. 다음은 왕비의 정원이다. 이곳은 왕비의 정원으로 슬픈 일화를 간직하고 있다. 왕궁에 있는 후궁과 근위병이 사랑을 나누다 왕비에게 발각되어 근위병을 목매달아 처형시킨 나무가 고목이 된 채 지금도 이 정원에 있다. 슬픈 사랑을 알고 있는 듯 고목이 된 덩치 큰 나무는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서있다. 다음은 프랑스식 정원이다. 프랑스식 정원은 자로 재어 칼로 썰어놓은 듯, 직각, 일직선으로 정리한 나무들이 특이하다.이렇게 정원을 지나면 궁전이 나온다.

  처음 만나는 궁전은 카를로스 5세 궁전이다. 카를로스 5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스페인의 공식적인 제1대 국왕으로 유럽에서 가장 화려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정작 카를로스는 이 궁전에 와보지도 못 하고 수도원에서 죽음을 맞이했다고 한다. 수많은 전쟁을 치르며 많은 영토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이곳으로 올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고 한다. 이사벨여왕 다음 왕은 후와니 여왕인데 그녀는 죽은 남편시신을 모시고 수도원만 찾아다녀 미친 여왕이라고 불렸으며 유배를 가게 되고 결국 여왕은 유배지에서 사망하게 된다.

  다음 궁전은 알카사바 궁이다. 알카사바 궁은 알함부라 궁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9세기 로마시대의 요새 밖에 세워졌으며 24개의 탑 중에 남았는 벨라탑은  그라나다 시내와 시에라 네바다 산맥까지 조망할 수 있다. 이 궁전은 밖에서 볼 때는 사각형 건물이나 안으로 들어가 보게 되면 원형건물이다. 미켈란젤로 제자가 100년에 걸쳐 완공한 궁전이다. 그러나 이 궁전은 이슬람 양식에 맞지 않은 건물이라 환영받지 못한 궁전으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은 나사로 궁이다. 나사로 궁은 이슬람 최후의 왕조인 나스르 왕조의 왕들이 살던 궁전으로 원래 7개의 궁전이 있었는데 지금은 4개의 궁전은 무너지고 3개의 궁전만 남아있다. 실내 장식과 외벽만 보존되어 있다.

메시아르궁은 모든 타일색이 5가지 색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다. 5가지색은 이슬람의 5천국을 뜻하는 녹, 청, 황, 백, 흑으로 이루어졌으며 천정에는 삼나무를 사용했고 이슬람 메카를 향한 왕의 기도실이 있으며 기도실 옆에는 꼭 물이 있어야 한다. 기도하기 전 몸과 마음을 깨끗이 씻어야 하기 때문이다.

  메시아르궁 옆에는 인도 타지마할의 모델이 된 아레아나스 궁전이 있다. 메시아궁 한쪽에는 대사의 방이 있는데 이곳은 각국 국빈이 왕을 알현하는 방이다. 이곳에는 「알라는 유일신이다.」라고 벽에 쓰여 있으며 왕좌 뒤에서 비치는 빛을 이용한 눈부심으로 확실한 왕이 얼굴을 알지 못 하도록 하는 즉, 왕의 권위를 가장 높여 주는 기능을 가진 방이다. 이곳 대사의 방에서 항복문서를 쓴 방이다. 항복문서에는 「나의 백성들은 모두 안전을 보장하라.」라는 조항을 두었으나 지켜지지 않아 사회 각처에서 중요하고 요직의 임무를 수행했던 유능한 유태인들이 처형되면서 스페인이 몰락이 길로 들어선 계기가 되었다.

  다음은 라이온 궁이다. 라이온 궁은 후궁들이 살던 곳으로 중정식 건물이다. 중정식 건물은 정원을 가운데 두고 양 옆으로 건물을 배치하는 방식이다. 라이온궁 은 작은 기둥이 124개 있으며 궁 앞 분수는 천국의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고 한다. 이곳에는 유태인이 왕에게 선물해준 사자 12마리가 받혀주고 사간을 알려주는 라이온 물시계가 있다. 시간이 되면 사자 입에서 물이 나오는 시계이다. 시계가 하도 신기하여 원리를 알아보려고 분해했는데 알 수가 없어서 다시 조립했으나 그 후부터 영원히 고장이 나서 지금은 사자 12마리 입에서 항상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궁전을 다 둘러 본 후 2층 성의 방호벽을 올라보니 왕의 항복문서를 내밀고 패잔병이 되어 쓸쓸이 이 땅을 떠났던 언덕과 아리랑 고개처럼 꾸불꾸불한 도로망을 볼 수 있다. 부귀영화를 누리며 최고의 삶을 살았던 패배한 왕의 뒷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와인이 문에는 신문고의 방이 있어 백성이 억울함을 들어주는 정치를 폈다고 한다.

 

4월 14일(火). 맑음. 5일차.

 

  오늘은 그라나다에서 꼬르도바로 이동하여 이곳에 있는 메스카다사원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08시40분 그라나다 숙소를 출발한다.

   2시간을 이동하면 꼬르도바에 도착한다고 한다.꼬르도바는 이슬람제국에서 가장 큰 나라인 안달루시아와 페르난도에 의해 함락된 도시로 한때 100만 명이 넘는 인구가 살았던 큰 도시였다. 500여개의 사원이 있었으나 함락 당시 모두가 불에 타서 소실되고 메스키다사원만이 남아있다. 당시 메스키다사원이 너무 아름다워 부수지를 못했다고 한다. 메스키다사원은 카톨릭과 이슬람문화가 혼합된 가장 아름다운 내부를 가진 사원이며 특히 기둥을 눈여겨 관찰하시라고 가이드가 설명을 한다. 바그다드의 이슬람사원과 비교를 해봐도 떨어지지 않을 정도의 규모를 가진 사원이다.

 

  메스키다는 「기도 드린다.」는 뜻이다. 785년 건축할 당시는 회교 사원이었다. 다른 신전에 쓰였던 기둥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둥 크기나 굵기가 다르다. 그래서 시공할 때 많은 개수의 기둥을 사용했으며 사원을 튼튼하게 짓기 위해 기둥과 기둥을 연결하는 아치 모양을 2개씩을 시공하는 특별한 공법을 사용했다. 수많은 기둥이 있어 「원주의 숲, 기둥의 숲.」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둥의 개수는 850개가 넘는다고 한다. 사원내부에 850개의 기둥이 있다면 그 크기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850개의 기둥에는 시공한 장인이 싸인을 해두어 기둥에 대한 사공의 책임을 질 정도로 투철한 장인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메스키다사원을 건립하고 난 후 3번이나 확장을 했다고 한다. 확장한 흔적을 실내 마루의 높 낮이가 다른 것을 보고 알 수 있다. 회교 사원의 최고봉인 미아라부 방은 메카를 가리키는 방이며 이 사원 전체 중 가장 아름답고 최고의 명당지역이라고 한다. 미아라부 방 옆에는 성당 보물실이 있다.

  성당 보물실에는 성체 안치대가 있는데 여기의 안치대는 기단과 몸체가 분리되어 매년 6월초에는 예수의 성체를 신자들에게 공개해주는 미사를 올린다고 한다. 이때에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이곳으로 모여든다고 한다. 성가대를 장식한 나무는 쿠바에서 가져온 것 이라 한다. 당시 쿠바와 필리핀은 스페인이 영토였다.

이 사원은 역사적인 흔적으로 한 공간에 두 개의 종교 양식이 존재하는 독특한 건축물로 세계에서 유일한 종교 건축물이 되었다.

 

 

  꼬르도바의 유대인 지구는 과거 안달루시아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는데 메스키타와 알카사르의 북쪽에 유대인들이 살던 유대인 마을이 있어서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정원과 공방이 모여있는 곳이다.

 

  모든 상상을 함께하면서 메스키다사원을 뒤로하고 미하스로 이동한다. 미하스는 말라가 주 남부 해안에 위치하여 하얀색 벽과 붉은색 기와 지붕이 해안선과 어우러져 평화롭게 보이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인데 안달루시아 지방의 두 번째로 큰 항구도시인 말라가는 인구 60만이 거주하는 스페인 6대 도시로 피카소의 고향이며 우리나라의 가수 키메라(1954년 경주 태생)가 레바논 부호와 결혼하여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미하스는 말라가의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특히 일본인들이 많이 찾는 도시라고 한다. 미하스에서 마차를 타고 아름다운 시내 골목길을 돌아보는 투어를 하고 한적하고 아름다운 카페에서 1.5유로(한화로는 1800원정도임)짜리 값싸고 맛나는 커피와 맥주를 즐겼다.

  오늘 우리가 묵는 호텔은 지중해 해변가의 상당한 수준의 호텔이나 비수기라 우리에게 제공되는 듯하다.

식사를 마치고 말라가 해변의 호텔방을 나온 우리는 해변 모래사장을 거니는 여유도 가졌다.

 

4월15일(水). 비 조금 온 후 쾌청. 6일차.

  오늘 일정은 말라가→ 푸에르토바누스→ 타리파→탕헤르(모로코 항구도시)→라바트→카사블랑카로 입성한다.

  여행 도중 처음으로 비가 부슬부슬 내리다가 1시간정도 지나서는 날씨가 쾌청하다. 날씨도 우리를 도와주고 있다. 부에노스 디아르 액티브! (기사님 안녕하세요!) 라고 젊고 잘생긴 우리 버스 기사님께 인사를 했더니 기사님이 대답하신다. “안녕 하세요!” 얼굴만 잘 생긴 게 아니라 센스쟁이 기사님이시다.

  모로코로 들어가는 페리를 타기 위해 항구도시 타리파로 이동했다. 타리파는 지중해의 끝 지점으로 해안선이 아름다워 스페인의 자랑거리 중 하나이다.

 

  스페인이 수도는 마드리드, 인구는 4000만, 면적은 한반도의 2.5배인 50만 ㎢로 유럽에서 3번째로 큰 나라이며 종교는 카톨릭이다. 투우와 강렬한 햇빛과 빨강색을 좋아하는 「정열의 나라.」라고 불리운다. 기후는 넒은 토지와 산맥이 있어 다양한 기후를 나타내고 있다. 유럽풍의 다양한 양식으로 건축물이 발달했으며 가우디 같은 유명한 건축가를 배출하기도 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속한 이베리아 반도는 기원전 600년경 켈트 족이 옮겨 와 살면서 원주민인 이베로 족과 피가 섞이면서 켈티베르 족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후에 흘러온 게르만 족에 쫒겨 이베리아반도 서북쪽인 갈리시아지방에 옮겨 살게 되었고, 바다쪽으로 옮겨온 페니키아 인이 지중해 무역을 장악하게 되고, 뒤늦게 지중해로 뻗어나가려는 로마와 충돌, 세 번의 포에니 전쟁에서 패배, 기원 전 38년 정식으로 로마제국의 영토가 되면서 역사의 막을 열게 된다. 로마의 지배는 서기 476년 게르만 족에 의해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종지부를 찍고 게르만 족의 일파인 서고트 족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서고트 족의 지배는 왕위계승 문제로 왕족간의 전쟁이 그치지 않다가,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용병으로 건너온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에게 망하게 되고 그리스도 인들은 북쪽 산악지대로 쫓겨나게 된다. 에스파냐는 1492년까지 무려 800년 가까이 이슬람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이슬람교와 가톨릭교의 종교 전쟁터로 변하게 되고 말았다. 이 전쟁을 수행했기 때문에, 가톨릭 국가이면서도 십자군 전쟁에 군사를 출전하지 않는 교황청의 배려도 있었다 한다. 북쪽 산악지역으로 쫓겨난 카톨릭 신도들은 1492년까지 계속된 국토 복원 운동인 레콩키스타(Reconquista) 시발이 되었다. 이베리아반도의 지배자가 된 이슬람 교도들은 여러 종족을 포용한 정책을 펴서 유대인들을 중용하게 되고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게 된다. 격렬해진 레콩키스타 전쟁으로 이슬람 세력은 계속 위축되어 1238년 그라나다에 세운 나스르 왕국이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이슬람 왕조이다. 그라나다 왕국은 250년간 유지되는데 계속 국가의 위세가 쇠약해 갔지만 알함브라 궁전에서 보듯이 화려한 이슬람 문화의 꽃을 활짝 피웠다. 1492년 이사벨여왕에 의해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을 몰아내고 통일을 이루었으나 카톨릭을 제외한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정책으로 그 유명한 종교재판을 시작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과 이교도의 축출이 벌어져 수많은 능력 있는 유대인 아랍인들이 죽음을 피해 에스파냐를 떠나야 했고 과학, 기술, 학문 등에서 기둥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사라지면서 에스파냐에는 정치와 무력만이 남게 되고 나라를 실제로 움직이는 실력자가 크게 부족하게 되어, 에스파냐는 통일의 순간 부강의 기틀을 잡는 동시에 쇠망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해가 지지 않는 에스파냐는 1492년 콜롬버스의 아메리카 발견을 시발로 멕시코를 포함하고 브라질을 뺀 남미대륙을 식민 통치하는 위업을 달성하게 된다. 이후로 수많은 종교전쟁과 왕위계승을 둘러싼 전쟁 등을 수행하면서 그 많던 재화와 국력은 소진되었다. 1898년 미국에 의해 쿠바, 필리핀, 프에로토리코, 괌섬까지 미국에 넘기면서 에스파냐의 화려한 해외 식민지는 모두 잃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 대전의 서막이 된 바스크, 카탈루냐지방의 분리 독립 주장과 보수 진보의 충돌 등으로 스페인 내전이 발생하게 되는데 스페인 역사에서 최대 비극이기도 하다.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 총독이 1975년까지 36년간 독재를 통해 세계의 일류국가에서 에스파냐는 3류 국가로 존재하게 된다. 1975년 프랑코 총독 후 친서방 정책을 펼쳐 이제 에스파냐는 유로존의 중심 국가로 발돋음하고 있다.

  스페인 타리파에서 페리를 타고 모로코 탕헤르로 가는데는 배로 1시간 30분 걸린다. 탕헤르에서 40분 정도 버스로 이동해서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은 현지식인데 파스타 일종으로 각종 야채와 육류를 혼합하여 쪄낸 요리인데 먹기가 거북하여 먹을 수 가 없다.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3시간 이동하여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로 이동하여 모하메드 5세 왕릉을 보러간다. 이동하는 도중 모로코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한다.

  유럽 여행 중 모로코 여행은 「여행속의 여행」으로 2박3일 동안 오지속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살펴보는 일정이라고 한다. 핵심은 ‘이곳은 오지이며, 모르고 가는 나라, 고생 속의 완결편이다.’라고 가이드는 겁을 준다. 한국에서 가지고 온 반찬, 컵라면으로 식사를 해결하라고 한다. 이 나라 음식이 질이 나쁜 게 아니라 우리 입맛에 맞지가 않다고 한다.

   모로코는 북부아프리카이고, 남부아프리카는 사막지대이다. 모로코는 4계절 변화가 거의 없고 건기, 우기로 나뉘며 연간 강수량은 400mm로 아주 작은 편이다.(참고로 우리나라는 연간 1,200mm가 된다.) 모로코의 수도는 라바트, 인구는 3,200만 명이다. 한국에 비해 널널한 땅에 많지 않은 인구가 살고 있다. 면적은 한반도의 4배인 71만 ㎢이고 종교는 회교(수니파)이다. 모로코는 입헌군주국으로 왕권이 아주 강하여 ‘왕이 나라’라고 한다. 지금의 왕은 모하메드 6세이다. 1912년 스페인과 프랑스령으로 분할 통치되다가 모하메드 5세 때인 1956년 독립하였으며, 동쪽과 남동쪽은 알제리, 남쪽은 서사하라와 접해 있으며 북쪽은 지중해, 서쪽은 대서양에 면한 나라이다. 농수산이 주산업이며 코루크나무와 초원지대가 넓어 모로코 특산물인 아르간나무가 유명하며 아르간나무는 세계자연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모로코를 일러 「풍요롭고 늘 먹을 게 풍부하고 아름다운나라」라고 한다. 이 나라는 광활하게 펼쳐진 넓은 초원 위에 스프링쿨러가 설치되어 있고 수로가 설치 되어 있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이는데 시설이 낡고 낙후된 느낌이다. 초원 사이사이에 커다란 굴뚝들이 많이 세워져 있는데 이는 물 저장소라 한다. 지리학적으로 이곳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유럽 각처로 수출하기에 아주 좋다고 한다. 모로코 국기에 그려진 별 모양은 이슬람문화의 5가지를 말하고 있다. 5가지는 코란, 빵, 물, 기도, 목욕(기도하기 전 몸을 깨끗이 씻어야하기 때문)이며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 옆 작은 방에 카페트를 깔아놓은 곳이 있는데 이곳이 기도실이다. 기도 시간에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곳이다. 이들은 기도가 곧 생활인 것이다. 모로코를 「지중해의 꽃이며, 축복의 땅이다」라고 부르고 있다.

  휴게소 주차장에서 현지인이 판매하는 노지딸기를 사서 먹었다. 2키로에 1유로로 가격이 저렴하고, 신선하고 달다.

  모로코의 수도인 라바트를 지나면서 현 국왕인 모하메드 6세의 부친인 모하메드 5세의 왕릉을 돌아봤다. 모로코의 독립을 이룬 모하메드 5세는 현 국왕의 조부이다. 지하 중앙에 모하메드 5세의 관이 모셔져 있으며, 왼쪽 위로는 현국왕의 부친인 하산 2세, 오른쪽에는 숙부인 물라이 압둘라가 모셔져 있다. 이 나라의 영웅인 모하메드5세 왕릉은 현국왕의 부친인 하산 2세가 건립하였다고 한다.

  모로코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카사블랑카로 이동한다. 라바트에서 1시간 30분 이동하면 카사블랑카이다. 카사는 「집」, 블랑카는 「하얀색」으로 「하얀 집」이란 뜻이다. 카사블랑카는 포르투갈人이 건설한 도시이며 모로코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교통요지이고 경제도시이다. 해변에서는 일광욕을 즐기는 관광객이 많고 상업도시이면서 휴양도시이다. 카사블랑카 하얀 집(아파트, 단독, 연립주택포함.)지붕위에 설치한 위성안테나가 장관을 이룬다. 군락을 이루고 있는 위성안테나가 또 다른 관광자원인 듯하다. 통신시설이 미비하여 이렇게 위성안테나를 설치하고 있다고 한다. 사회 간접자본에 대한 시설이 낙후한 이곳은 위성에 의한 TV 시청이 유일한 방법으로 우리나라의 IT산업의 높은 수준이 자랑스럽다.

  카사블랑카의 호텔은 예상보다 험악했다, 복도의 불은 스위치 위치를 못 찾아 손바닥으로 벽을 만져야 했고 방의 시건 장치도 불안하기만 하다. 밤새 울리는 공사판의 소음소리도 지친 여행객의 잠을 설치게 한다.

 

4월 16일(木).맑음. 7일차.

  오늘은 카사블랑카의 하산타워→ 모로코 고대도시인 페스(가죽염색공장)→ 탕헤르까지 이동하는 일정이다.

  “언덕 위의 하얀 집”하며 부르던 낭만의 도시 카사블랑카는 별로이다. 이름처럼 화려하고 뭔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저 하얀색 집과 위성안테나 뿐이다. 아프리카와 유럽이 만나는 지점인 상징성을 갖고 있다.

 

하산메스키다 사원.

  이슬람인은 성지순례를 꼭 가야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 하산메스키다 사원은 일생에 꼭 한번은 순례를 다녀오는 곳이라 한다. 이 사원은 국민의 성금으로 지은 사원으로 7년이 걸려 최근에 지은 사원이며 실내장식 기술자만 3300명이 동원 됐으며 건축가는 프랑스人이고 단일 건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모스크(사원)이다. 바다 위에 지어진 사원이며 파도치는 모습을 사원 실내 바닥에서 볼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사원 안에 관광객 출입을 금하고 있다.

 1200년전 고대도시에 현대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하여 페로 이동하고 있다. 페스는 모로코에서 카사블랑카, 리바트에 이어 3번째 큰 도시이다. 페스의 구시가지는 1200년 이슬람왕조의 건물과 작은 골목골목이 미로 같은 도시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에서 현재 시민이 생활하고 있으며 구시가지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도시이다. 미로 같은 골목길 한쪽에 회교사원이 있어 하루에 5번 기도시간을 가진다. 한 골목을 지나고 나니 그리 크지 않은 마루(교실처럼 보임.)에 어린이들이 모여 앉아 교사를 쳐다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인다. 어린이들이 연령대로 보아 우리나라 어린이집과 흡사하다.

이곳 페스는 현재 국왕의 부인인 왕비의 고향이기도하다. 이 국왕이 결혼은 일반기업체의 평범한 여사원(즉, 평민)을 왕비로 맞이하는 결혼으로 세기의 이목을 집중시킨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가죽염색공장

 

TV 여행프로그램에서 보았던 모로코 가죽염색공장을 본 첫 소감은?

「아이고! 아이고! 세상에!」이다.

‘이 염색공장에서 일을 하는 저분들은 어떤 사람일까?’

‘저렇게 열악한 환경에서 어떻게 일을 할까?’

‘저 노동자들의 건강상태는 어떨까?’

‘저렇게 일을 하고 저들의 받는 보수는 얼마일까?’

‘가죽옷을 입는 사람들은 이러한 실상을 알기나 할까?’

10분정도 작업장을 보노라니 두통이 오고 구역질이 난다. 입구에서 자그마한 식물(방향 식물)을 하나씩 주면서 코에 대라고 했던 이유를 알 만하다.

「나는 참으로 幸福하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되겠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창밖을 보니 끝없이 펼쳐진 벌판 밀밭에 함께 피어있는 양귀비와 엉겅퀴같은 들꽃의 환상적 조화가 가라앉은 마음을 풀어주고 있다. 달리는 고속도로에서 바라보는 대서양 낙조 또한 일품이다.

  저녁은 현지식인 「따진」이라는 음식이다. 사라다 한 접시와 쇠고기를 양념해서 찐 요리인데 사라다만 먹고 찐 쇠고기는 먹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숙소는 유럽의 휴양도시인 탕헤르 해안가에 있는 호텔이다. 탕헤르는 모로코 북쪽 해안 지브롤터 해안을 바라보는 곳이며 유럽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모로코로 입국할 때 페리에서 처음 내린 항구도시이다.

  저녁도 시원치 않고 우리 일행(6명)은 제주에서 가져온 한라산 소주를 한잔씩 나누며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며 여행자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여유와 즐거움이 있어 우리는 여행을 좋아하나보다!

 

4월 17일(金). 맑음. 8일차.

  오늘은 모로코에서 페리를 이용하여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일정이다. 스페인에서 저녁을 먹은 후 훌라밍고 공연 관람이 있다.

  숙소인 탕헤르에서 항구로 이동하고 항구에서 10시 출발하는 페리를 타고 12시 30분 스페인 타리파 항구에 도착했다. 타리파에서 점심을 해결하고 투우의 도시 론다로 향했다.

  론다로 향하는 길목에서 이베리아 반도의 끝 영국령 지브롤터를 멀리서나마 볼 수 있었다. 지브롤터 해협은 이베리아 반도에서 아프리카까지 14.7km에 불과한 좁은 해협으로 영국과 스페인의 영유권 분쟁지역으로 영국의 해, 공군기지가 설치되어 있으며 전략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다. 이슬람에게서 이사벨여왕이 지브롤터를 되찾았으나, 스페인의 왕위계승 전쟁으로 영국에 빼앗기고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주민투표를 하여도 지역주민들이 영국령으로 남길 원한다고 한다.

  론다는 새비야와 함께 투우의 도시이며, 고산지역에 지어진 천연 요새도시이다. 평균 고도가 700미터로 높은 산악지역에 지어진 도시이다. 릴케와 헤밍웨이가 사랑한 마을인 이곳 론다는 스페인 내전을 다룬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 에서도 등장하는 마을이기도 하다.

  론다로 향하는 굽이굽이 산악 길을 한참 달려 도착했다. 이곳 론다에 있는 투우장은 1785년 만들어진 것으로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며 고대 투우의 본 고장이다.

  해발 700고지에 35,000명 인구가 살고 있는 마을로, 고대 로마 제국시대 스키퍼드장군이 건설한 요새 도시이며 소설가 헤밍웨이가 거주했던 곳이다.

스페인의 투우는 재례 의식의 시초이며, 투우는 스페인이 문화이다. 현재 투우경기는 3월부터 10월에 매주 日요일에 열린다. 투우, 축구, 훌라밍고로 스페인의 열정을 볼 수 있다. 투우를 통해 人生을 보며 사는 법을 얻는다고 한다. 투우장은 그리 크지 않다. 왜냐하면 투우실황을 가까이에서 실감나게 관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스페인에서 가장 오래되고 현재 투우가 열리는 투우장을 돌아보고 세비아로 이동하기 전, 이 마을과 반대편 마을을 잇는 거대한 다리인 「푸엔타 누에보 다리」를 보러갔다. 까마득한 「엘타르」 절벽사이에 시설된 이 다리는 죄수들을 인위적으로 처형하지 않고 다리위에 세워놓은 다음 다리 밑 계곡으로 밀어버리는, 즉 죄수를 처형하는 장소로 사용 했다 한다. 이 계곡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주검이 되어 이 세상을 떠났을까?

  다리 옆으로 많은 카페들이 형성되어 있어 사람들은 커피와 다과를 들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며 이곳에서 마시는 저 음식이 맛은 어떨까?

  세비아는 우리가 세빌리야라고 알고 있는 곳으로 뮤지컬 카르멘의 무대가 되는 곳이며 신대륙으로 출발하는 지점으로 신대륙발견이 중심지이다. 신대륙 물품이 처음 이곳으로 들어오는 곳이며 포르투칼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콜롬부스 무덤이 이곳 세비아 성당에 안치되어 있다. 콜롬부스가 신대륙으로 출발할 때는 바르셀로나에서 출발했으며 돌아올 때는 세비아로 들어왔다. 세비아와 바르셀로나를 박람회 도시라고 한다. 그 이유는 이 두 도시에는 볼거리가 많아 각 국가와 대기업체에서 박람회 유치를 많이 한다고 한다.

아메리카 신대륙발견이 주는 가장 큰 혜택은 농산물을 전해 받은 점이다. 특히 유럽에 감자가 들어오게 된 점은 크나큰 행운이다. 감자, 옥수수, 밀 등 농산물이 들어오면서 유럽이 강국이 될 수 있었다.

  저녁은 현지식인 「깔라바씸」이란 요리로 호박, 소고기, 치즈, 감자를 섞어 볶아낸 음식으로 먹을 만하다. 모로코 현지식과는 비교할 수 없다.

  저녁 후 우리는 훌라밍고 공연 관람으로 이어진다. 터키여행에서 민속춤 관람을 하고 실망이 커서 오늘도 그러려니 하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그러나 막상 공연하는 모습을 보니 그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훌라밍고는 「불꽃같은」이란 뜻으로 「정열의 나라 스페인의 심장」이라고 불리우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개방적인 민족 감정과 기백이 풍부하고 힘차게 표현하는 정열의 무대이다. 이 춤은 천시 받는 집시들의 한을 춤으로 풀어내는 것으로 무대에 출현하는 남녀무용수들의 진지한 태도로 손님을 대하는 태도가 무척 인상적이고 ‘내가 대접을 받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진정한 스페인이 정열을 보는듯한 무대이다. 선택 관광70유로가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훌라밍고 공연 관람을 끝으로 오늘의 일정을 마친다.

 

4월 18일(土). 맑음. 9일차.

  오늘일정은 스페인 세비아 대성당에서 포르투칼 파티마로 이동하는 대장정」이다. 세비아에서 파티마까지는 버스로 7시간이 소요되며 포르투칼로 가는 날이다. 포르투칼도 EU 연합국이라 별다른 수속 없이 국경을 넘을 수 있다. 현재 EU 연합국은 28개국이다.

  09시 숙소를 출발하여 처음 도착한 곳은 스페인 광장이다. 스페인은 영국식 표현이며 정식명칭은 에스파냐광장이다. 유럽에는 함께 모여 즐기는 광장문화가 발달되어 마을마다 광장이 만들어져 있는데 이 에스파냐 광장은 스페인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이 광장에는 유태인거리도 보존하여 당시 건물,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다. 큰 도로를 중심으로 해서 반달모양의 대칭구조가 예수가 백성을 양팔로 안고 있는 모습이라 한다. 대형 물탱크를 실은 살수차가 광장주변을 청소하는 모습조차도 정겹게 보인다.

  유태인거리인 돈후망광장을 걷다보면 1492년 건립된 신대륙발견 기념탑이 있고 오페라 세빌리아 이발사의 배경이 된 주택도 보존되어 있다. 페르난도스가 12세기말 스페인 정복 후 지은 회교사원이 탑인 「히랄라 탑」은 탑이 너무 아름다워서 부수지 않고 보존했다고 한다. 이 탑은 왕이 말을 타고 탑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다. 히랄라는 「돈다, 바람개비.」란 뜻이다.

(세빌리야의 이발사의 무대였던 건물)

  다음은 세비아 대성당이다. 세비야 대성당은 11시가 되어야 입장이 가능하다. 세비야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딕양식 건물로 로마의 성베드로 성당, 런던의 세인트 폴 사원에 이어 3번째로 큰 성당이다. 처음에는 회교사원이었으나 1401년 공사를 시작하여 1518년 성당으로 완공했으며 처음 지어진 본당은 고딕 양식으로 뽀족한 첩탑을 만들었다. 첩탑을 만든 이유는 많은 눈이 쌓이면 눈이 무게에 의해 건물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쌓인 눈이 바로 떨어지도록 건물이 하중 문제를 고려한 공법이다. 이 성당의 성체 안치실에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아기 예수 왕관(1904년 제작됨.)과 성인의 뼈를 봉안하여 모셔 있다. 중앙 재대에는 신대륙에서 가져온 금, 은, 보화로 조각된 예수님의 탄생에서 죽음까지의 일생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있다. 중앙제대 맞은 편에는 성가대자리가 웅장하고 화려하게 제작되어 있다. 세비야 대성당에는 부활절 등 중요한 행사 때에만 여는 중앙문이 있다. 이 문 앞에는 1490년 출생한 콜롬부스의 아들 페르난도의 무덤을 모셔놓고 있다. 이는 페르난도가 아버지 콜롬부스와 함께 항해를 하며 「콜롬부스 항해일지」를 쓰고 살아생전에 수집한 모든 책들 약 3만권 모두를 국가에 헌납한 공을 인정받아 이 대성당에 시신을 모셨다고 한다. 이는 유럽 도서관이 시초가 됐다고 한다. 또한 아버지 콜롬부스의 유해도 이 성당에 모셔져 있는데 콜롬부스의 유해는 땅에 묻힌 게 아니라 공중에 떠 있다. 그 이유는 “나는 스페인 땅에 묻히고 싶지 않다.” 라고 하는 콜럼부스의 유언에 의해 스페인으로 모셔오기는 했으나 땅에 모시지 않고 공중에 모셔 놓았다. 이러한 기막힌 발상은 어디에서 오는 것 일까? 이 유해는 신대륙을 발견한 엄청난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4명의 왕이 관을 어깨에 메고 있다. 관 앞쪽을 매고 있는 2명의 왕은 얼굴을 들고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관 뒤쪽을 메고 있는 2명의 왕은 고개를 푹 숙인 체 밑을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앞의 왕은 콜롬부스의 항해를 찬성한 왕이며, 뒤에서 관을 받쳐 든 왕은 콜롬부스의 항해를 반대한 왕이라고 한다. 또한 높이 설계되어 있는 성당 내부 천정의 그림과 건축미를 잘 볼 수 있도록 대형 거울을 바닥에 설치해 거울에 비친 천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도록 한 세심한 배려가 독특하다.

  세비야 대성당을 둘러본 후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지금까지 우리를 안내해준 김세기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했다.

  스페인 세비야에서 포르투칼 파티마까지는 7시간을 버스로 이동한다. 창밖을 보니 올리브나무가 천지에 가득한데 올리브나무는 버리는 게 하나도 없다. 열매는 식용으로 가지와 나무는 가구재료, 땔감으로 사용하며 거름이나 퇴비를 쓰지 않고 지중해의 척박한 땅에서만 생존하는 나무이다. 스페인 사람들은 올리브나무를 가리켜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한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3번을 내려 쉬며 커피 한잔을 하고 산천에 피어있는 아름다운 꽃과 올리브나무를 보다보니 포르투칼 파티마에 입성했다. 파티마는 성모 마리아 발현의 도시이며 리스본 북쪽에 있는 인구 약 7,000명의 모여 사는 작은 도시이다.

  이 작은 도시가 유명해지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모여드는 이유는 1917년 5월13일 성모 마리아가 발현한 기적 때문이다.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이곳 양치기 어린이 3명에 의해 확인된 뒤 이곳을 찾는 포루투갈 국내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순례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으며 또 성모마리아가 발현했던 자리에는 1928년 예배당이 세워졌다. 숙소에서 식사와 샤워를 하고 짐을 정리하고 나서 9시 30분부터 파티마 대성당에서 하루 중 묵주 기도를 드린다고 해서 서둘러 기도에 참석했다. 참례한 각국의 신자들이 대표로 나와서 묵주기도의 한 구절씩 선창하는데 한국을 대표해서 성지 순례 간 신자 두 분이 우리 말로 성모송을 바쳐서 숙연한 느낌이다.

  묵주기도가 끝나고서 성모상을 앞세우고 광장을 한 바퀴 도는데 정말 장관이다. 우린 초를 준비하지 못해서 그냥 따라 갔지만 참례자를은 모두 손에 촛불을 들고 행렬을 하는데 성스러운 기운을 느낀다. 9시30분부터 시작된 기도는 10시30분 조금 지나서 마쳤다.

행복하고 멋있는 하루가 되었음을 감사드린다.

9일차 일정은 이렇게 기쁨과 사랑을 가득 가슴에 담고 하루를 마감한다.

 

4/19(日). 맑음. 10일차.

  아침에 일찍 일어나 파티마 성당에서 5시에 미사가 있다고 해서 참례하러 갔더니 외국인 신부님이 신자 4명을 앞에 두고 미사를 집전하고 있다. 그 미사가 끝나고 한국의 순례자들이 신청한 미사가 시작되었다. 허용된 시간이 30분이라서 미사는 간단하게 끝났다. 미사 후에 초를 사서 봉헌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파티마 대성당 (바실리카 대성당)은 1917.5.13. 이곳에 성모마리아가 나타나셔서 어린 목동 루치아(10세), 야신타(7세), 프란시스쿠(9세) 3명에게 다섯 번 같은 날에 다시 오시기를 약속한다. 성모 마리아는 다시 이곳에 오셨고, 이런 사실이 급속히 알려지며 전 세계의 수많은 신자들이 모여 들기 시작한다. 1917.10.13. 다섯 번째로 오신 날에는 전 세계에서 모인 7만명의 신도가 운집한 장소에 발현하였고 1930년 바티칸 교황청에서도 성모 발현지로 공식 인정하였다.

  그후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찾아오기 때문에 당시 성당의 크기로는 이들을 수용 할 수 없어 교황청에서 9,000명의 신자를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성당으로 개조하도록 허락을 하고, 모든 경비를 부담하여 오늘의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당시 성모님을 알현 했던 어린이 두 사람은 유행병으로 일찍 죽어 그 유해가 이곳 성당에 안치되어 있으며 한 어린이 루치아는 바티칸 성당 수녀로 봉직했다가 2005년 97세로 사망하여 이곳에 유해를 안치했다고 한다.

  성모가 발현했을 때 3가지의 예언을 하였다고 전하는데 첫째가 2차 대전 발발이며, 둘째가 소련이 등장과 몰락, 셋째가 교황의 암살에 대한 예언이라 한다. 실제로 1981년5월13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모 발현 기념미사를 집전하던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저격을 받았으나 기적적으로 살아나고, 그 이듬해 5월13일 감사 기도 차 파티마를 방문했을 때, 스페인 광신도의 암살 기도를 막아, 바오로 2세 교황은 파티마에 대한 깊은 애착을 보냈다 한다.

인구 7,000명의 조그만 마을은 년간 600만명이 찾는 성지로 카톨릭 신도들이 즐겨 찾는 명소가 되었다. 성당 광장 가운데로는 대리석으로 바닥을 한 길게 난 길이 있는데 무릎을 꿇어 무릎 걸음으로 그 길을 가고 있는데 「참회의 길, 약속의 길」 이라 한다.

  다음 방문지는 파티마에서 버스로 1시간을 달려 도시 전체가 성곽으로 둘러 싸인 요새도시 오비도스로 갔다. 오비도스는 마을 초코렛 축제를 하는지 많은 관광객이 모여들고 있다. 마을이 포근하고 아기자기한 모습이 마치 친정에 돌아와 친정엄마의 품에 안긴 것처럼 아늑하고 정겨움을 느끼게 한다. 오비도스를 가볍게 돌아보고나서 포르투칼 왕족들의 휴양지였던 신트라로 향했다.

  신트라는 마법의 성 같은 중세적 분위기를 가진 마을로 거리 곳곳에 조각품들을 전시하여 이곳을 찾는 관광객의 마음을 즐겁게 해준다. 신트라는 왕족의 별장터로 6000정보의 산림이 있어 일 년 내내 푸르름을 맛 볼 수 있는 휴양지로 1955년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지정되고 유럽의 부호들이 즐겨 찾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시에는 포루투갈이 중립을 선언하고 참전치 아니하자 유럽의 많은 부호들이 이곳에 별장을 확보하였다.

 

이곳 중국 식당에서 점심을 마친 우리 일행은 유럽의 최서단인 까보다로까로 향했다. 유럽의 땅 끝 이베리아반도의 최서단인 셈이다. 로까는 「곶」이라는 뜻으로 포구를 말한다. 해안 절벽위에서 망망대해인 대서양을 바라보며, 이곳에서 바로 질러 대서양을 건너고 태평양을 건너면 우리가 사는 제주로 갈 수 있다 생각하니 지구도 얼마 크지 않구나 하는 착각에 혼자 웃음을 지어본다.

 

까보다로까는 대서양에서 들어오는 배들을 관찰하기 위한 장소로 포르투칼의 해양산업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곳이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해안가에는 벨렘 수중탑이 서있다. 밸렘탑은 바다와 강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져 있다. 이탑은 당초에는 물속에 세워졌으나 테주강의 물흐름이 바뀌면서 물에 잠기지 않았다고 한다. 1515~19년에 건설된 이 탑은 하얀 나비가 물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마뉴엘 양식의 건축물로 3층 구조이다. 아름다운 테라스가 있는 3층은 옛날 왕족의 거실로 사용하였으며, 현재는 16~17세기 가구가 전시되어 있다. 2층은 포대로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벨램의 마리아상이 서 있다. 1층은 스페인이 지배하던 시대부터 19세기 초까지 정치범 감옥으로 사용되었다. 1983년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었다. 

  발견기념탑앞의 제로니므스 수도원은 마뉴엘1세가 엔리케왕자의 위업을 칭송하고 포루투칼이 낳은 대항해사인 바스코 다 가마의 세계일주를 기념하여 엔리케항해왕자가 지은 예배당자리에 16세기초에 건설한 수도원이다. 마뉴엘양식을 대표하는 이 화려한 건물은 해외로부터 얻게 된 부를 토대로 지은 것으로 대항해 시대의 영화를 보여주는 수도원이라 할 수 있다. 남문의 입구 왼쪽에 엔리케 왕자의 동상이 있고 고딕 르네상스건축물인 산타마리아 교회와 연계되어 있다. 1502년부터 1672년까지 170년간 대공사 끝에 일궈낸 건축물로 총길이 300m에 달하는 화려하고 장엄한 건물로 1983년에 제로니무스수도원과 벨렘탑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짧은 일정으로 우리 일행은 사진 촬영으로 관광을 마쳐야 했다. 바로 인근에 발견의 탑 혹은 발견 기념비라는 거대한 탑이 있다. 제로니무스수도원 앞 임페리오 광장을 지나 테주 강변에 세워져 있다. 바스크 다 가마가 항해를 떠난 자리에 세워진 이 기념비는 1960년 「엔리케 항해왕」사후 5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것으로 높이가 53m이다.

  리스본 시가지로 들어오면서 미국 센프란시스코의 금문교를 닮은 길이 3,200m 높이 190m의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가 있는데 포루투갈의 혁명이 일어난 날을 기념하여 4월25일교라 한다. 그 다리 위쪽으로 높이 109m의 예수님 상이 리스본 항구를 내려다보며 서 있는데, 이 예수님상은 남편이나 아들을 전쟁터에 보낸 여인들이 성금을 13년 동안이나 모아 만든 것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피해가 없음을 감사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세워진 평화를 상징하는 조각품으로 그리스도께서 두 팔을 벌려 평화를 기원하는 모습이다.

  리스본 시가지는 1755년 대지진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어 지진 후 지어진 신시가지와, 옛 시가지로 구분하여진다. 보도에는 지진 폐허에서 나온 부산물로 보도를 장식한 타일을 볼 수 있었는데 이들의 알뜰함과, 아픈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 나라 국민들의 준비성을 볼 수 있었다. 시가지 중심에는 1755년 대지진시 폐허가 된 리스본의 재건에 도움을 준 영국의 고마움을 표현하기 위해, 1902년 영국의 에루하르도 7세의 리스본 방문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에루하르도 7세 공원을 조망하였다. 기하학 무늬의 화단의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으로 리스본 시가지가 한 눈에 보이는 위치에 조성되어 있었다.

  짧지만 2일 간의 포루투갈의 여행을 마치고 내일은 암스텔담으로 이동한다.

 

4/20(月). 맑음. 10일차.

  새벽1시 모닝콜! 살다가 이런 시간에 모닝콜을 받기도 처음이다.

  급히 서둘러 공항에 나가야 리스본 공항 04시20분발 암스텔담행 비행기를 탄다. 도착한 공항은 적막 그대로이다. 항공사 직원도 아직 출근 전이다.

  우리 일정은 오늘 오후 21:35분 인천행 비행기를 타는 일정으로 암스텔담 시티 투어가 남겨져 있다. 리스본 공항에서 출발하는 KLM 네델란드 국적기가 1시간을 연착하여 05:30분 출발하여 암스텔담공항에 10시에 도착했다. 여기서 1시간 연착은 다반사라는 가이드 안내에도 조금은 심기가 불편하다. 암스텔담에는 10시부터 21시까지 10시간이 남기 때문에 선택 관광으로 1인당 70유로씩 내고 암스텔담 시내투어를 하기로 했다.

  네델란드 암스텔담은 90여개의 섬을 매립하여 5,000여km의 운하로 연결되어진 도시이다. 운하에서 유람선을 타고 시티투어를 하고 잔세스칸스의 풍차마을을 돌아보고 점심을 먹는 일정이다. 공항에서 버스를 이용하여 30분정도를 이동하여 도착한 곳이 잔세스칸스 풍차마을이다. 스페인의 풍차는 풍력을 이용하여 정미소의 역할을 하는 풍차이지만 네델란드의 풍차는 역할이 다르다.  네델란드의 네델은 「낮은, 낮다」라는 뜻이고, 랜드는 「땅」. 즉, 낮은 땅 저지대 국가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곳의 풍차는 저지대의 물을 배수하는 역할을 한다.

  네델란드는 낙농국가이다. 상업적 농업이 발달 되었고 철강강국,조선업(운하, 요트)이 발달했으며, 다이야몬드 가공술이 발달되었다. 네델란드 남북으로 라인강이 흐르고 있어 풍부한 물이 확보되어 저절로 화훼산업이 발달했다. 1년 중 반이 겨울이라 눅눅하고 우울증이 많은 나라이다. 그래서 유일하게 마리화나(마약)가 합법적으로 거래되는 나라이며, 성 산업이 개방되어 있기도 하다. 진작 성 개방 등으로 치안확보가 어려울 듯 하나 이곳은 세계 안전 5대 도시에 들 정도로 성이 문란하지 않고 안전한 국가이다.

  자전거가 많아 공기오염이 적고 자동차 사고가 적은 편이다. 암스텔강이 범람하여 땜이 형성되어 도시이름을 암스테르담이라고 했다. 이 나라 국민들의 평균키가 180cm로 세계 최장신국가이다. 그 이유는 발달된 낙농산업 덕분으로 보고 있다. 이곳 공항이 도시 중심가와 인접한 이유는 화훼농업이 발달하여 화훼 수송을 주목적으로 운행됐으며 공항 주변이 화훼 단지였다.

  88년 서울 올림픽 때 우리나라 축구 감독인 히딩크의 고향이기도하다.

  풍차마을 관광을 마치고 우리는 한식당에서 오래간만에 김치찌게와 제육볶음과 상추로 고향의 맛을 즐길 수 있었다. 근데 김치를 더 달라고 했더니 돈을 더 달라고 한다! 인솔자가 더 주라고 해서 더 먹긴 했지만 씁쓸하다.

  한식으로 거하게 점심을 해결하고 다이야몬드 세공공장을 견학했다. 빤짝거리고 화려한 다이아는 그림의 떡이다.

  라인강 하류와 바닷물을 낀 운하 5,000km.90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암스텔담, 운하에 생활하수가 유입되면서 수질개선문제가 심각한 현안이 되고 있다.

암스테르담 담광장은 「암스테르담의 모든 길은 담광장으로 통한다.」라고 한다. 암스테르담 중앙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위치했으며 지금은 왕궁, 신교회, 전쟁기념탑, 세계적으로 유명한 밀랍인형 박물관 등 주변에 볼거리가 많아 가장 많은 관광객이 모여드는 곳이다.

 

  네델란드 왕궁은 처음에는 시청이었다. 즉, 네델란드에서 이곳 암스테르담이 가장 부유한 도시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밀랍 인형 박물관에는 우리나라 배용준과 닉쿤이 인형도 전시됐다고 한다.

12세기 강을 막이 땜을 만들어 요새화된 도시이며 무역항으로 목재, 소금, 화훼등이 매매되는 부자도시이다. 바닷물을 조절하는 간척 기술이 우수하다. 모래를 섞은 간척지라 지반이 약하여 모든 건물들이 조금씩 기울어지고 있어 행정 당국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운하는 교통, 방호, 수위 조절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항구 주변 건물은 도시 창고 였으나 지금은 주거 공간및 위락시설이 형성됐다. 운하를 가운데 두고 2,500채의 수상 가옥이 있어 그곳에서 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수상 가옥에는 「안네의 일기」의 무대가 된 집이 있다. 263번지의 가옥은 안네가 숨어 지내며 일기를 쓴 다락방이 있는 집이다. 숨어서 숨죽이며 살면서도 안네는 “나는 아직도 사람들의 마음은 따뜻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쓰고 있다.

 

  이렇게 하여 우리 일행 35명은 육로 5,000km를 달리는 대장정의 길을 10박11일 긴 여행을 마무리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을 마치면서 모든 계획을 세우고 여행하는 동안 모든 어려운 일을 자원해서 맡아서 처리해준 용천 씨 부부 그리고 여행 내내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준 석희 씨 부부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이 글은 용천 씨 부부의 기행문을 기초로 작성함)

 

## 참고사항

0. 경비 : 1인당 234만원

0. 동반여행자 : 34명

0. 주요 경로

인천공항-네델란드 암스텔담-스페인 바르셀로나(1박)-사라고사-마드리드(2박)-똘레도-콘수에그라-그라나다(1박)-꼬르도바-미하스(1박)- 푸에르토바누스-모로코 탕헤르- 카사블랑카(1박)-페스-탕헤르(1박)-타리페-론다-세비야(1박)-파티마(1박)-포르투갈-오비도스-신트라-리스본(리스보아)(1박)-암스텔담-인천공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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